최근 개그우먼 이수지 씨가 연기한 대치맘에서, "영재적인 모먼트"가 언급되었다.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내게도 비슷한 전환의 시기가 도래했다. 바로 이직의 순간, 또는 내 꿈을 향한 모멘텀의 시작이다. 올 한 해를 시작하며 마음 먹은 것은, 비록 직장에 묶여 있는 몸이지만, 인문학 연구자의 길을 걷고야 말겠다는 것이었다. 학회지의 소논문도 많이 써서 최대한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임용이나 최소한 강사 자리라도, 아니 그 논문들 모아서 책이라도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내가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는 출판사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겪고 있는 불황이라 제대로 붙어 있는 직원들도 없었다. 내 부서는 영문편집부. 내 일은 영문편집장. 누가 영문 편집일을 하면서 200만원대 초반의 최저 연봉을 받고 있겠는가? 직함이 편집장이지만 외래교수 강의료 증빙이 지원사격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은행대출도 쉽지 않다.
그래도 인생의 마지막 모멘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회사에 채 다 쓰지 못한 2024년 연차 하루를 사용하여 선배 교수 및 연구자 선생님들과의 2월 콜로키움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며 아이들과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참고로 우리 회사는 연차를 못 썼다고 돈으로 주지 않는다. 기독교 출판사가 참... 운영은 자신들이 말하는 신적 선물인 자비와 은혜와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내 모교이자 한국에 귀국한 후 지금까지 강의하고 있는 학교의 선배 교수님이다.
"네, 교수님. 어쩐 일이세요?"
"박사님, 잘들어갔어요? 다름이 아니라 우리 학교 xxxx연구소에 갑자기 급하게 전임연구원 자리가 비었는데 관심있어요?"
이렇게 시작된 통화는 길지 않았다. 이 연구원 자리는 정년은 커녕 굉장히 단기 연구사업이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바로 모멘텀이 온다는 것을.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파도를 타고 환상의 퍼포먼스를 하려면 열심히 굽이쳐 상승하는 두려운 파도로 열심히 양팔을 저어 맞서 올라야 한다는 것을.
담당 선생님이 전화가 이어 왔다. 10분 정도의 통화. 그리고 이제 나의 시간이 왔다. 회사에 가능한 빨리 알려야 한다. 2월 12일 수요일 저녁. 2월 말 까지는 비즈니스데이로 7일이 남았다. 사실 28일은 연차였는데, 내 소식을 듣고 열받은 내 직속 상관인 부목사가 연차를 회사사정이라고 직권으로 취소해버렸다. 국가 지원을 받는 연구소 사업이라 2월에 떠나시는 선생님에 이어 그 빈 자리의 고용이 반드시 3월 1일부터 승계되어야 한다고 얘기하고 28일에 그만둬야 될거 같다고 했더니, 그것도 바로 전화를 했을 때는 아주 축복하며 대인배답게 받아주더니, 그 다음 날 아침에 뭐에 꽂혔는지 회사 업무 전산망에서 아주 날 천하에 악인이자 몹쓸 사람으로 모함하기 시작했다. 밀린 연차를 쓴 일들도 모두 자신과 회사의 뒤통수를 치기 위한 철저한 계산이었다고. 그렇다고 내가 무슨 금전적 손해를 끼친게 있나? 하긴, 내가 나가면 최저시급과 같은 월급 받으면서 영문 편집장 하실 분이... 내가 볼 땐 구하기가 쉽지 않을거다. AI를 쓴다고 해도 누군가는 검수를 해야하니까.
내 잘못인가? 그렇다면 불확실한 미래를 두고 일반적인 한 달 전에는 얘기를 했었어야 했나? 모험을 했어야 했나? 내가 신이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난 신이 아니다. 인간이다. 사람이다.
앞으로 남은 5일이 걱정이다. 나가기 전에 해야할 일들, 마쳐야 할 일들을 나열해서 내게 던졌는데, 만에 하나라도, 아니 아마 이미 마음속으로 내 퇴직을 막기로 결정했다면, 자칫 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노무사와 상담이라도 해봐야하나?
가난한 인문학자에게도 희망이 있는가?